J는 살기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에디터 구현모입니다.
3주 전에 써둔 원고를 열었습니다. 제목까지 정해두고, 소제목도 나눠두고, 절반 이상 완성해놓은 글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뒷북치는 글이 됐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에요. 저는 모든 걸 미리 세워두는 사람입니다. 친구들이랑 등산을 가도 몇 시에 어느 역에서 모여서 어떻게 갈지, 근처 음식점은 뭐가 있는지, 소요 시간은 얼마인지 다 짜둡니다. 친구들은 등산도 왜 이렇게 계획적으로 가냐고 놀라더라고요. 글도 그래요. 어거스트 뉴스레터나 한국일보 칼럼 같은 글도 완성 기준으로 최소 1주, 길면 1개월 전에 미리 써둡니다. 마감 직전에 허겁지겁 쓰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아요. 미리 써두고, 다듬고, 묵혀뒀다가 꺼내는 거죠.
근데 현실은 좀 다릅니다. 계획을 세우는 데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그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을 반복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건 불확실성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래 이기려 했고, 그만뒀습니다. 대신 감내하기로 했어요.
|
|
|
1. 계획은 세우라고 있는 거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2. 극복이 아니라 감내입니다
3. 분명하게 쌓이는 쪽에 에너지를 씁니다 |
|
|
계획은 세우라고 있는 거지,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
|
|
일과 인생은 복잡계에 비유할 수 있어요. 체감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제가 한 달 전에 글을 써둬도, 변수는 언제든 찾아옵니다. 함께 일하는 에디터가 본업 때문에 갑자기 휴식을 취할 수도 있어요. 제가 공들여 쓴 주제가 어느새 시의성을 잃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요. |
|
|
더 뼈아픈 건, 제 글이 발행되기 전에 누군가가 같은 주제로 더 좋은 글을 내는 경우입니다.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건 글 쓰는 사람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각자가 하는 세부 직무는 다를지언정, 불확실한 업무가 태반이잖아요. 기획서를 완벽히 써도 상사의 한마디에 방향이 바뀌고, 프로젝트를 열심히 준비해도 클라이언트가 마음을 바꾸고, 연간 목표를 세워도 조직 개편이 모든 걸 리셋해버리는 세상이니까요.
J형 인간에게 이건 배 위에서 파도를 맞는 것과 같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데 에너지를 쏟는 사람이, 그 계획이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을 반복하면 불만이 쌓입니다. 세상을 향한 불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불만이요. '왜 이걸 예측 못 했지?', '내가 좀 더 잘 준비했으면 됐을 텐데.' 이런 식으로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건 예측의 실패가 아닙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거예요. 저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런 계획적인 성향은 일의 영역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내 인지 하에 있는 모든 것에 계획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데미지가 많이 쌓입니다. 부모님의 건강, 투자한 주식의 등락, 10년 다닌 회사의 구조조정. 제가 어찌 할 수 없는 영역이 삶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죠.
|
|
|
여기에 AI가 등장했습니다. 세상의 하부 구조가 바뀌고 있어요. 하부 구조가 바뀌는데, 그 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영향을 안 받을 리가 없잖아요. 미시적으로 보면, AI 덕분에 개인의 생산성은 올라갔습니다. 저도 AI를 쓰면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속도가 빨라졌어요. 글감 리서치도, 데이터 정리도, 초고 작성도 예전보다 효율적이에요.
깃허브와 MIT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AI 코딩 도구를 사용한 개발자들의 작업 완료 속도가 55% 빨라졌습니다. 2시간 41분 걸리던 작업이 1시간 11분으로 줄었어요. 개발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디자인하는 사람도, 분석하는 사람도 비슷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을 겁니다. |
|
|
그런데 문제는 속력입니다. 내가 빨라진 만큼 남도 빨라졌고, 남이 빨라진 만큼 기대치도 올라갔고, 기대치가 올라간 만큼 변수도 커졌습니다. 예전에는 한 달짜리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한 달을 잃었어요. 지금은 일주일 만에 끝낼 수 있는 프로젝트가 넘쳐나지만, 그만큼 방향 전환도 빈번하고,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인간을 초월하는 지능을 도입해보니,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역설입니다.
2026년의 불확실성은 '모르는 것'에서 오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너무 빨리 알게 되는 것'에서 옵니다. 선택지가 넘쳐나고, 정보가 넘쳐나고, 가능성이 넘쳐나는데, 그 중에서 '나의 것'을 골라야 한다는 압박. 과거의 불확실성이 안개 속을 걷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불확실성은 열 갈래 길이 다 보이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에 가깝습니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과잉이라서 판단이 마비되는 겁니다.
저는 오랫동안 더 세게 계획하면 이 흔들림을 줄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J니까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깨달은 게 하나 있어요. 불확실성은 '극복'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극복이라는 단어에는 '이겨낸다'는 뉘앙스가 있잖아요. 이겨내서, 확실한 상태에 도달한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래요.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생기고, 그걸 해결하면 또 다른 게 나타나요. 마치 두더지 잡기 같은 건데, 두더지 잡기와 다른 점은 판이 점점 넓어지는 거죠. 나이를 먹을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관심사가 넓어질수록 흔들림의 범위도 같이 커집니다.
그래서 저는 방향을 바꿨어요. 극복이 아니라 감내. 이겨내는 게 아니라 안고 사는 것.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에 미리 불안해하지 않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상태 자체를 인정하기. "그냥 다 그런 거다" 싶은 마음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보기.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닙니다. 특히 J 성향에게는요.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모르겠다'를 받아들이는 건 큰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죠. 그래서 저는 다른 곳에서 에너지를 보충하기로 했습니다.
|
|
|
감내하려면, 단단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내 인생이 불확실할지언정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고,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쌓이는 일을 취미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쌓이는 것'이란 뭘까요. 저는 이렇게 정의해요. 꾸준히 하면 티가 나는 것. 내가 세운 계획에 나를 맡기면 결국 그곳에 다다르게 되는 모든 것들이요.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삶에서 꾸준히 해도 티가 나지 않는 게 대부분이에요. 네트워킹을 열심히 해도 당장 기회가 오지 않고, 성실하게 일해도 승진이 보장되지 않잖아요.
그런데 예외가 있어요. 운동입니다. 러닝을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처음엔 쉬지 않고 2km 뛰기도 힘들었습니다. 지금이라고 잘 뛰는 건 아니지만, 중간에 멈추지 않고 뛰는 힘은 늘었습니다. 이런 힘이 축적되면 몸은 물론이고 마음도 평온해집니다. 유산소 운동으로 몸만 바뀌는 게 아니라 마음의 내구력도 같이 쌓이는 거예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글빨이라는 것은 상위 1% 문인을 제외하고 나면 모두 터득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문학이 아닌 사회과학적 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겪은 거라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의외로 공부도 그렇습니다. 일본어 공부, 주식 공부, 부동산 공부, 중국어 공부, 한자 공부 등 세상에 많은 것들을 공부하는 일은 상위 1%만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축적의 힘으로 끝까지 밀고 갈 수 있습니다.
어거스트 레터 첫 회를 쓸 때는 한 편에 2주가 걸렸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빨라진 게 아니라, 정확하게 통제하게 됐습니다. 내가 뭘 말하고 싶은지, 어디서 끊어야 하는지, 어떤 단어가 더 적확한지. 이런 감각이 수십 편의 글을 거치면서 쌓였어요. 칼럼 마감 전에 미리 써둘 수 있게 된 것도, 이 축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명한 영역에 나를 투자하는 셈이에요.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누적되는 무언가를 내 삶에 두는 겁니다. 형태는 중요하지 않아요. 운동이든, 언어든, 악기든. 핵심은 '꾸준히 하면 축적되는 것'이냐는 거죠. 커리어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시장은 내일 또 빠질 수 있고, 조직은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오늘 1시간 뛴 건 내 몸에 남아 있거든요. 어제 쓴 글 500자는 내 실력에 쌓여 있어요. 이 작은 견고함이, 거대한 흔들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
|
|
물론 축적이 보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방향이 틀리면 축적이 독이 되기도 해요. 10년 동안 매일 글을 썼는데 아무도 읽지 않는 블로그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건 쌓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쌓을지 고르는 판단입니다. 내 스스로 만족하는지, 나아지고 있다는 신호가 있는지 점검하면서 쌓아야 해요.
축적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역으로 축적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면서 불안이라는 이 부정의 에너지를 해소할 수 있을지 내게 되물으면 답은 명확히 나옵니다. 뭐라도 쌓아보자. 검정치마는 춤을 추면서 절망과 싸우고 나는 뭐라도 쌓으면서 세상과 조응하자는 거죠
저는 여전히 불만이 많은 J입니다. 계획대로 안 되면 짜증나고, 변수가 생기면 화가 나고,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돌아가면 속이 상해요. 이건 바뀌지 않을 겁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 있어요. '왜 나한테 이러지'라고 묻는 대신, '원래 그렇지'라고 중얼거리게 됐다는 거죠. 그리고 그 에너지를, 쌓이는 곳에 쓰기로 했다는 거예요. 그게 정답인지는 모릅니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보고 또 한심해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오늘 쌓은 건 남아 있을 테니까요. |
|
|
지난달 발행했던 한우물레터 '나의 이갈이 이야기'에 대해 보내주신 피드백을 모아봤습니다. 🤗 |
|
|
👤 춤추는 사과 | 한우물 클럽' 레터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 종사자분들이 들려주는 깊은 이야기가 흥미롭고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는 기분이라 신선했는데, 이번 레터는 그 어떤 레터보다 깊은 공감이 되는 내용이라 푹 빠져서 읽었습니다. 저도 비정기적(?) 두통을 앓고 있어요. 아마 첫 직장을 다니면서 부터 생긴 것 같은데,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어요. 건강검진 때 일부러 뇌 CT 를 받아보기도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현재로는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거나 체력적으로 급격히 힘이 들 때, 온 몸이 긴장되면서 두통이 찾아온다고 추측하고 있어요. 저도 각종 영양제도 섭취하고 마사지 도구를 사용하면서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비정기적으로 노력하고 있는데요. 두통을 앓기 전에는 왜 이렇게 사람들이 괴로워하는지 잘 몰랐는데, 때로는 구토감까지 유발하는 두통을 앓고 나니... 겉으로 표 나지도 않는 이것이 뭐길래! 라는 슬픈 마음까지 들더라구요. 지금은 저도 구현모님처럼 관리를 잘 하자, 함께 가는 질환처럼 생각하고 잘 다독여주자, 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은 위에서 오지 않습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옵니다." 얼마 전에도 두통 때문에 주말 내내 고생했는데, 마지막 이 문장에 울컥하는 마음이네요.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 까나리아 | 저도 한 5~6년 전 수면 이갈이 때문에 정말 고생했었어서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어금니 파손, 두통, 수면 장애 등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마우스피스 1년 정도 사용 했었는데 이갈이가 왔던것 처럼 어느순간 사라지더라구요. 이후로는 과음 이후 드물게만 이갈이가 와서 참 행복했었습니다. 현모님도 부디 쾌차? 완치? 하시길 바랍니다.
👤 나비 | 이겨내지 말라는 대목이 참 위로가 되고 좋았습니다. 행복은 상방에서 오지 않는 다는 말씀도요. 저도 최근에 디스크 통증 때문에 출근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날 때마다 연차를 쓰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거든요. 그러면서 정선근 교수 영상을 여러 개 봤는데 그분도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디스크 아플 땐 요추전만 자세 취하고 조심하면서 회복하다가 정상 되면 또 나쁜 자세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아프면 또 요추전만 자세 하면서 조심하면서 살아야지 완치같은 거 없다고. 완치가 없다는 말이 참 절망적인데 나빠지면 다시 조심하라는 말은 또 위안이 되더라고요. 가끔은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좋은 때가 있는 것 같아요. 그나저나 저희 어머니도 이갈이가 심한 편인데 언제 한 번 같이 치과를 가봐야 겠어요.
👤 지나가는 나그네 | 뭔가 누군가에게도 전혀 영양분이 될 것 같지 않은 '이갈이'라는 단어가, 제 눈을 사로잡았어요. 저도 이갈이를 그리고 조금이나마 고치는 과정을 겪었었지만, 한번도 이렇게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더 다가왔었나봐요. 삶의 가장 작은 부분일수도 어쩌면 가장 큰 불행일수도 있는 '이갈이'가 이렇게 누군가가 건네주는 위로이자 한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단어라니... 어쩌면 저도 너무 모든 상황을 이길려고 해서 더 깊게 다가왔었나봐요. 저도 갑자기 확 바꿀수는 없지만, 너무 이길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조금씩 걸어가볼게요.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
|
|
무한도전 나름 가수다 특집에서 정형돈님이 정준하님에게 "인생 파는 사람 어떻게 이겨요" 라고 샤우팅했습니다. 사실 피드백을 받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이거 공감할 사람이 있으시려나? 했는데 정말 많은 피드백을 남겼습니다. 저는 주로 온리팬스, 카지노 합법화 등 논쟁적인 지점에 국한해서 여러 의미로 뜨거운 피드백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위로와 공감의 피드백은 처음이어서 당황하고 감사합니다.
제 이갈이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더 심해졌습니다. 최근 들어 오른쪽으로 목이 잘 안 돌아가는데 이게 자는 자세 때문인지, 보톡스를 맞았는데도 측두근이 부활하고 힘이 들어가서 그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레터가 발행되는 날에 제가 치과에 가게 되는데요, 부디 아직 제 측두근이 조용히 잠자고 있길 바랍니다.
내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 모두 나이듯, 내 질병과 건강함 모두 나니까 우리 모두 유병장수해요. |
|
|
CELEBRATION - LE SSERAFIM | SBS 260503 방송 |
|
|
💌 협업문의 augustletter08@gmail.com
|
|
|
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오리진 • 요니 • 장희수 |
|
|
Copyright © AUGUST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
|
|